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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일주일만에 퇴사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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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직 활동을 시작한지 2개월이 좀 지났을 때 기대도 안 했던 곳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채용이 결정되었다. 이 곳을 지원할 때의 난 장기화되어 가는 구직 활동에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고, 모바일 기획자를 뽑는 곳은 대체로 다 문을 두드렸던 것 같다. 금요일에 채용 연락을 받고 월요일부터 출근하기로 했고, 월요일과 화요일에 잡혀있던 두 건의 면접을 취소했다.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구직 사이트에 올려둔 이력서를 모두 내리고, 지인들에게 취직 연락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내심 알 수 없는 불안감 같은 것이 있었는데, 정확하게 어떤 것 때문인지는 딱 집어내기 어려운 복합적인 것이었다. 그냥 이상한 회사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주말 내내 했던 것 같다. 
 
금요일 오후에 인사팀으로부터 출근하면 제출하라는 입사 서류 목록을 받았을 때, 이해 안되는 서류가 있었을 때 그때 출근을 보류했더라면,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어도 됐을텐데 하는 것이 그 회사를 그만둔 지금의 생각이다. 그 서류란 '혼인관계증명서'다. 지금까지 다섯 곳의 회사를 다녔는데 한 번도 입사할 때 혼인관계증명서를 제출한 적이 없었다. 주변 지인들도 그런 서류를 회사에 제출해 본적이 없다고 특이하다, 이상하다는 반응이었다. 연락을 준 인사팀 담당자에게 난 미혼인데도 이 서류를 제출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제출하라는 짤막한 답변을 받았다. 며칠 뒤에 좀 더 일찍 입사한 다른 직원에게 들었는데 그분은 미혼이라 제출하지 않아도 되는 줄 알고 묻지도 않고 안 냈는데 인사팀에서 별말이 없었다고. 당황스러웠다.
 
이 회사는 IT 기업은 아니나 웹사이트와 앱을 개발하는 부서가 있고 나는 모바일 앱 서비스 기획자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을 했었다. 면접 때 보수적인 회사라 세미정장을 입어야 한다는 점 외에는 크게 우려되는 점은 없었다. 그동안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을 수 있는 자유로운 복장의 회사에 다녔기 때문이다. '복장은 뭐 갖춰입을 수 있지! 설마 진짜 운동화 신는 사람이 없을까? 출근해서 확인해야지.'라며 마음을 다잡고 출근을 했는데, 사내에서 마주치는 직원들 복장이 전부 갖춰 입은 스타일뿐이었다. 운동화는 당연히 없었고. 고객과의 미팅이 잦은 부서가 많아 그럴 것이라고 머리로 이해는 했지만 그렇지 않은 부서의 직원들까지 복장을 강요하는 건 마음으로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근무하는 부서가 있는 층에 내려 자리를 안내 받았을 때 들었던 첫인상은 '더럽다'였다. 책상과 컴퓨터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있었는데 닦을 것이 없어서 둘째 날에 물티슈를 가져가 출근하자마자 닦았을 때 3번을 닦아도 묻어나오는 그 찌든 때라니... 마치 갈색 책상에서 물이라도 빠지는 것 같았다. 전 주인은 책상도 안 닦고 일을 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랍은 비어있었지만, 알 수 없는 가루들이 덕지덕지 떨어져 있어서 사용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참고로 난 결벽증이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냥 정리정돈 잘 못하고 게으른 보통 사람이다. 하지만 전에 다녔던 회사들 중 어느 곳에서도 3번씩 닦을 정도로 찌든때가 나오는 책상을 써본 적도 만든 적도 없었기에 그 자리에 대한 애착감은 첫날 제로에서 둘째날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지급된 컴퓨터는 19인치 모니터 2개(그 중 하나는 누렇게 열화되어 제대로 된 색을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와 윈도우 데스크톱이었다. 전 직장에서는 대부분의 인원이 노트북을 사용했고 회의에 자유롭게 가지고 다니며 업무를 봤기 때문에 약간 실망은 했지만, 스타트업쪽이 장비 퀄러티가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사내 계정을 받고 메신저에 로그인했을 때 내가 소속된 팀은 '웹 기획팀'이었고 소속자는 나 혼자뿐이었다. '난 모바일 기획자인데, 왜 웹 기획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날 뽑았던 상사가 늦게 출근한다 해서 첫날 오전에는 먼지구덩이 컴퓨터를 만지작 거리면서 뻘쭘하게 시간을 보냈다. 업무 지시를 할 사람이 그 상사뿐이라는 것과 팀에 기획자가 나밖에 없다는 점에서 나는 점점 쌔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나중에 알고 보니 기획자들이 내가 들어오기 전에 많이 그만뒀다고. 하아....) 늦게 출근한 상사에게 내가 왜 웹 기획팀 소속이냐 물었더니 여기는 다 같이 한단다. 그러면서 아직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전에 경쟁사 사이트와 우리 사이트 그리고 앱들을 살펴보고 있으라고. 이때 약간 사기를 당한 기분이 들었다. 면접 때는 이 부분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웹도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일단 지켜보자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다.
 
먼저 경쟁사 사이트를 살펴보면서 구조와 메뉴들을 파악해 정리하고 자사의 사이트를 열었는데 깜짝 놀랐다. 집의 와이드 모니터로 봤을 땐 몰랐는데 회사의 모니터로 보니 글자와 이미지는 깨지고 퀵메뉴가 화면을 계속 가려서 사이트의 내용을  제대로 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경쟁사 사이트도 비슷한 구성으로 되어 있었지만 깔끔하게 보였기 때문에 더 놀랐다. 내가 만약 동일한 모니터를 쓰는 고객이라면 경쟁사로 갔을 것이다. 며칠 지나서 개선점을 정리해서 얘기했으면 좋겠다는 상사의 말에 사이트를 보면서 개선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을 조목조목 정리해서 가져갔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의 반응은 다소 의아했다. "이건 내가 없을 때 이렇게 바뀐거라...."라든가 "아 그래요?"하는 식으로 자기는 몰랐던 일이라는 식의 변명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의견을 내고 있는 것뿐인데 내가 지금 그의 실수를 지적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올드한 디자인이 아직 남아있는지, 오류처럼 보이는 화면이 노출되고 있는 건지, 팝업마다 디자인이 다른 건지 그의 반응을 보면서 왠지 이해가 되었다.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거나, 사이트에 관심이 없었거나, 개선 의지가 없었거나, 이 셋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미팅을 했던 건 출근한지 5일째였던 금요일이었는데 그동안 이 회사의 분위기를 살펴보면서 나의 업무 의지가 많이 꺾인 상태여서 이들 중 얼마나 바뀌겠나 싶은 부정적인 마음뿐이었다.
 
그 생각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던 건 늘 ASAP로 업무 지시를 내리는 최고참 상사였다. 곧 그만둔다는 기획자가 있었는데 그가 그만두면 그의 일을 내가 받아야 하는 분위기여서 어떻게 일을 하는지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 최고참 상사와 그가 늘 했던 작업은 랜딩 페이지의 수정과 테스트, 결과 보고였다. 내가 근무하는 동안 2~3번의 테스트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번은 참조에 포함되어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랜딩 페이지의 수정 버전을 라이브에 반영하고 두 시간 동안 수치를 보는데, 데이터 보고는 한 시간 간격으로 진행되었다. 놀랐던 건 PV와 전혀 상관없는 수정 작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PV 데이터가 보고되었고, 라이브 반영 후 두 시간 반쯤 지났을 때 수정된 페이지에서 수집되는 데이터에 허수가 늘어났다는 이유로 롤백되었다. 대체 수치가 얼마나 늘어났길래 롤백을 하나 싶어서 기획자에게 물어보니 실패한 기획이었다고 판단할 수 없는 미미한 수치였다. 허수를 유발하게 하는 수정도 아니었고 애초에 두 시간 테스트로 판단을 하는 것에 무리가 있어 보였는데, 해당 테스트 관련자들은 군기가 바짝 든 신병처럼 '그분'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고 그것이 익숙해 보였다. 
하루는 업무 중에 사무실의 모든 인원이 벌떡 일어나서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나도 일어난 적이 있다. 뒤를 돌아보니 '그분'이 사무실에 들어왔던 것이었다. 그가 모든 직원에게 앉으라는 말을 할 때까지 모두가 자리에 서 있었고, 그가 회의실로 몇몇 사람들을 불러 들어간 뒤에는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무실 사람들이 허둥지둥 뛰어다니며 일을 처리했다. 그가 사무실을 나갈 때까지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분위기는 계속되었는데 처음 있는 일은 아닌 듯 어수선하면서도 일사불란했다. 꽁지에 불이 붙은 듯 착착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의 앞으로가 그려져서 가슴이 어쩐지 갑갑해졌다. 
불필요한 훈련 같은 테스트와 보고도 그렇고 경직된 분위기도 별로였지만 가장 싫다고 생각했던 건 기획서 작성이었다. 기획자가 조언을 구해와서 기획서를 함께 보다가 또 놀랐다. 새로 디자인되어야 하는 배너를 파워포인트로 그려왔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디자이너가 아닌데 왜 이렇게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분'께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 해오라 하신다고. 디자인 역시 그대로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할 거면 경력 많은 디자이너가 왜 필요하고 기획자가 왜 필요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출근하는 동안 매일매일 고민에 휩싸였고 마음을 다독이며 잠이 들었다가 한 두시간 만에 깨서 불면에 시달렸다. 이곳에 다니면 '그분'의 손발로만 움직이게 될 것 같았다. 나는 서비스 기획자로서 능력을 더 키우고 싶고 선배 기획자와 개발자, 디자이너들에게 더 배우고 싶은데 이곳의 환경은 그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리고 우연히 알게 된 사무실 곳곳에 배치된 성능 좋은 CCTV의 존재라든가, 퇴근 시간부터 일정 시간 동안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없다는 규칙이 있다든지, 딱 보기에도 오랫동안 청소를 안 한 것 같은 천장 에어컨(이상하게 사무실에만 들어가면 밭은 기침이 계속 터져나왔다),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휴가와 연차 같은 것들도 고민에 무게를 더했다. 한편으로는 스타트업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일을 해서 이런 기분이 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은 내가 지금 2018년을 살고 있는 것인지 과거에 있는 것인지 혼동이 올 정도였다. 나름 알려진 회사였기에 더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지금까지 사회 생활을 하면서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라 오만 생각을 거듭하다 결국 출근 첫주 주말을 보내면서 1주일을 버렸다 생각하기로 하고 그만두자고 결론을 내리고 월요일 오전에 퇴사하겠다는 의사를 회사에 전달했다. 사실 그때까지 근로계약서에 사인도 하지 않은 상태여서 더 결심하기가 쉬웠는데, 왜 일주일이 지나도록 서류에 사인을 하라는 연락을 주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설마 이렇게 빨리 퇴사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겠지?(오래 근무한 사람이 별로 없긴 했다.)
 
그 회사를 그만두고 나의 수면은 정상적으로 되돌아왔다. 일주일간의 짧은 경험이었지만 꽤 강렬했는지 그만둔 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때의 기분이 아직 생생하다. 지금도 내가 너무 성급하고 무례한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영혼 없이 일하면서 후회할 바에는 빨리 그만둔 것이 회사에게나 나에게나 옳은 일이었다고 자위하기도 한다. 뭐가 됐든 이미 벌어진 일, 이 또한 경험이고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를 보낸다.
 
 
by ichiz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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